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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남한산성(행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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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 行宮)은 유사시 국가 비상사태에서 종묘와 사직을 옮겨 왕실과 조정을 보전하도록 건립된 조선 유일의 비상시 임시 수도(보장처) 역할을 수행한 궁궐입니다.
1. 남한산성 행궁의 역사
건립 배경 (1626년, 인조 4년): 후금(청)의 위협이 고조되던 시기, 총융사 이서(李曙)의 주도하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상궐(73칸)과 하궐(154칸) 등 총 227칸 규모로 완공되었습니다.
병자호란의 항전지 (1636~1637년): 청나라의 침략으로 강화도 피난길이 차단되자 인조는 남한산성 행궁으로 파천하여 47일간 농성하며 어전회의를 주재하고 군사를 독려했습니다. 결국 성 밖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으나, 전란 중 국가 기능을 실질적으로 유지했던 핵심 무대였습니다.
영조·정조·철종의 능행길 숙소: 호란 이후에도 역대 왕들이 영녕전·영릉(여주 세종대왕릉 등) 참배나 전적지 순시를 위해 머물며 국방 체계를 점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2. 구조적 구성과 공간 기능
남한산성 행궁은 가파른 산지 경사면을 계단식 석축으로 다듬어 배치되었으며, 왕의 생활 공간(내전)과 정무 공간(외전), 그리고 국가 제례 시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가. 외전(하궐영역):외행전
왕이 신하들과 접견하여 군사 작전 및 국정을 논하던 공식 편전. 평상시에는 광주유수(수어사)의 집무 공간으로 쓰임.
나. 내전(상궐영역):내행전
왕의 침전이자 왕실 가족의 거처. 가장 깊숙하고 높은 단에 자리 잡아 보안성과 독립성을 확보.
다. 진입 및 부속시설(한남루, 외삼문, 내삼문)
정문인 한남루(2층 누각)를 지나 내·외전으로 연결되는 위계적 출입 통로.
라. 왕실 제례 시설(좌전(左殿) 및 우실(右室))
궁궐의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에 따라 행궁 좌측에 종묘 위패를 모시는 좌전, 사직단을 대신하는 우실 배치.
마. 특수부속건물(좌승당·일장각·재덕당)
광주유수의 집무실, 수어사의 참모 관사, 제례 준비 및 사당 지원 건물 등.
3. 구조적 특징
비상시 임시 수도형 궁궐 체계: 온양행궁(휴양)이나 화성행궁(능행) 등 일반적인 행궁과 달리, 종묘의 신주를 봉안할 수 있는 좌전을 별도로 두어 완전한 조정의 기능을 갖췄습니다.
산지 지형을 활용한 단차 배치: 평지 궁궐의 좌우 대칭 격식 대신, 경사 지형을 따라 아래에서 위로 한남루 → 외행전 → 내행전 순으로 올라가는 입체적 축선 배치를 취했습니다.
광주유수영 관아와의 복합 구조: 평상시에는 경기 남부의 군사 거점인 광주유수부의 최고 행정·군사 집무실로 기능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4. 역사적 변천 과정
가. 조선 후기 번영과 정비 (17~18세기):
숙종·영조 연간에 걸쳐 건물이 증축되었으며, 순조 17년(1817년) 광주유수 심상규가 좌승당과 일장각 등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여 관아로서의 면모를 완비했습니다.
나. 일제강점기 훼손 및 소실 (20세기 초):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남한산성은 의병 투쟁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이에 일제는 성내 사찰과 행궁의 무기고 등을 파괴하고 방화하여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 이후 행궁 터는 민가와 밭, 산림으로 방치되었습니다.
다. 발굴 조사 및 단계별 복원 (1999년~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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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토지 경계 및 유구 발굴 조사가 본격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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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2004년: 상궐(내행전 영역) 복원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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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011년: 하궐(외행전, 일장각, 한남루 등) 및 좌전 복원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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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총 10여 년간의 공사를 거쳐 252칸 규모의 현재 모습으로 전면 복원·개방되었습니다.
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2014년):
산성 자체의 축성 기술뿐 아니라 비상시 임시 수도로서 행궁과 종묘(좌전)를 온전히 보존한 독창적 역사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되었습니다.
5.백제 한성기 토기·수혈유구와 통일신라시대 초대형 건물지·초대형기와군 발굴
남한산성 행궁터(행궁지) 발굴조사는 조선 인조 대에 건립된 행궁 복원을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조선시대 지표면 아래 하부 문화층에서 백제 한성기 토기·수혈유구와 통일신라시대 초대형 건물지·초대형 기와군이 발굴되면서 남한산성이 2,000년 가까운 군사적 거점이었음을 실증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가. 백제 시대의 흔적과 출토 유물
발굴 경위 및 위치: 2000년대 초 행궁 외곽 담장(서쪽 내외 담장 사이) 및 행궁지 일대 하층 조사를 통해 초기 백제(한성백제기) 층위가 드러났습니다.
출토 유구와 유물:
백제 한성기에 해당하는 수혈주거지(움집터) 및 저장 구덩이 유구가 확인되었습니다. 빗살이나 격자무늬가 타날된 단경호(짧은목항아리), 심발형토기(깊은바리), 적갈색·회청색 연질/경질 백제 토기편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역사적 의미: 《동국여지승람》 등 고문헌에 남한산 일대가 "백제 온조왕의 옛 성터"라는 전승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행궁 지하에서 실제 한성백제기 유구가 확인되면서 한강 유역을 방어하던 백제의 초기 요새 또는 취락이 실존했음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게 되었습니다.
나. 통일신라시대의 흔적:
주장성(晝長城) 대형 건물지와 초대형 기와:
행궁 발굴에서 가장 큰 고고학적 성과 중 하나는 하궐 외행전 앞마당 지하에서 드러난 대규모 통일신라시대 건물터입니다.
-초대형 기둥자리와 석축 유구:
장축 53.5m, 단축 17.5m에 이르는 대규모 평면 장방형 건물지로, 지상 하중을 견디기 위해 두꺼운 석축 벽체와 거대한 주춧돌(초석)을 둔 팔작·우진각 양식의 대형 관방(군사) 건물이었습니다.
내부 체적이 약 1,400㎥에 달해, 수만 명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와 군량미를 보관하던 군사 창고로 추정됩니다.
-무게 20kg 안팎의 초대형 기와 (세계 최대급):
건물지 퇴적토 속에서 수백 점의 기와가 가지런히 쌓인 상태로 발굴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일반 암키와(약 4kg)보다 4~5배 무거운 15~20kg에 달하며, 길이 약 64cm, 두께 4~5cm의 국내외를 통틀어 보기 드문 초대형 기와였습니다.
-(銘文) 기와 출토:
기와 표면에 ‘甲辰年 末村主 敏良(갑진년 말촌주 민량)’, ‘天主(천주)’, ‘城(성)’, ‘官(관)’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는 지방 말단 행정관인 촌주(村主)가 기와 제작과 공납을 감독했음을 보여주며, 당시 국가 차원의 대규모 토목공사가 신라 주도로 진행되었음을 입증합니다.
-통일신라 인화문토기:
도장 형태의 문양을 찍은 전형적인 7~8세기 인화문(印花紋) 토기편들도 함께 수습되었습니다.
다. 고고학적·역사적 의의
이 발굴 조사는 《삼국사기》 문무왕 12년(672년) 조에 등장하는 다음 기록의 실체를 규명했습니다.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步)였다."
나당전쟁기 신라가 한강 하류로 남하하는 당나라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축조한 핵심 보루인 주장성의 최고 중심지가 바로 현재의 남한산성 행궁 자리였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현재 복원된 남한산성 행궁 외행전 앞마당에는 당시 발굴된 통일신라 건물터와 초석 유구의 일부를 관람객이 직접 볼 수 있도록 노출 전시장 형태로 보존해 두고 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터 지하에서 쏟아져 나온 거대한 통일신라 기와의 크기와 형태, 제작 배경을 생생하게 확인하려면 통일신라 초대형 기와의 비밀 영상을 참고해 보세요. 행궁 외행전 앞마당에서 수습된 약 20kg 무게의 암키와 발굴 실물과 나당전쟁 시기 축조 배경을 알기 쉽게 정리해 전달해 줍니다.